9. 어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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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ELLO / 작성일2025-04-03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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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9.어른, 소년       ***   유우키 마코토의 일상은 무미건조하다.기상시간은 스케줄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그는 대부분 오전 10시 경에 일어난다. 트릭스타의 활동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주일하고 이틀 전을 마지막으로 끝난 『한겨울 밤의 꿈』 촬영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도 없었다. 딱히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트릭스타의 멤버들은 그에게 한동안 휴식하길 권했다. 열심히 달려왔으니, 조금은 멈춰 서 있어도 된다는 의미였다. 『한겨울 밤의 꿈』이 방영 되는 기간 동안은 잊히지 않으니 다행이었다.대중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건 피곤하다. 그룹활동을 쉬고 있는 지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간간히 얼굴을 비춰야 한다. 하고 싶은 것도 때로는 절제해야 한다. 이목을 신경 쓰는 건 연예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우키는 침대에 몸을 뻗었다. 그는 침대 2층의 바닥에 손을 뻗었다. 낮은 천장 끝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트릭스타의 숙소와, 세나의 집은 확연히 다른 환경이었다. 그는 몸을 뒤척였다. 14일은 어딘가에 적응하기 충분한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유우키는 몇 년을 생활해 왔던 집이 어색했다. 세나의 집에 그림자를 두고 온 기분이었다. 바닥에서 몸이 둥-둥 떠올라, 공중을 부유하게 될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첫 일주일간은,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캐리어에 싸들고 온 짐을 풀지 않고 닷새를 보냈다. 그대로 탱자탱자 노닥이다가, 숙소에 둔 속옷이 떨어져 갈 때 쯤 짐가방의 앞주머니를 열었다. 파우치에 든 간단한 물건들이 숙소 안에 들이찼다. 잊은 건 아니었으나, 손을 대기 싫었다. 아케호시는 유우키의 행동을 보며 언제라도 떠날 것 같은 사람 같다고 말했고, 히다카는 그의 말에 조심스럽게 동의했다.캐리어는 미련처럼 닫혀 있었다. 열어서 정리한다면 정말로 ‘끝’이 찾아 올 것 같았다. 그는 일부러 캐리어가 있는 곳을 보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니 조금은 편해졌다. 짐가방을 열지 않는 것 빼고 그의 일상은 매우 평온했다. 세나가 사지 않는 인스턴트 음식을 양껏 먹었고, 카메라가 없는 방 안에서 배를 긁으며 뒹굴었다. 침대에 하염없이 누워 있었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깼다.그의 이 방탕한 일상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히다카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숙소에 새벽에서나 들어왔다. 고정 스케줄이 주말 예능과 일일 드라마 밖에 없는 아케호시는 유우키의 옆에 드러누워 방탕한 삶을 영위했다. 새 곡을 받거나 콘셉트 회의를 할 것도 없으니, 빈 시간이 늘어났다. 데뷔 이래로 처음 맞이하는 휴식을 그들은 속절없이 보냈다.이사라는 유우키의 모습을 보며 간간히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런 유우키를 걱정했다. 규칙적으로 생활할 것을 당부하진 않았지만, 이사라는 그가 곧 아플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그의 소꿉친구인 사쿠마 리츠에게 무언가를 들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유우키는 그의 생각을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그가 해 주는 걱정을 마음껏 누렸다. 그는 이사라가 만들어 주는 아침을 먹었고, 점심은 그가 만들어 놓고 나간 도시락으로 대신했다.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일주일은 하염없이 지나갔다. 그 동안 세나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간다면 상사병을 앓을 줄로 알았아. 하지만 오히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멍했다. 피곤함이 깊게 몰려왔고, 자꾸만 잠을 자고 싶었다. 아케호시는 유우키에게 하루에 20시간은 자는 게 아니냐 물었다. 히다카는 그게 꽤나 걱정스러운 듯 했다. 하지만 유우키는 정상이었다. 그는 천천히 제 궤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나 이즈미는 없었다.세나가 했던 말이 맞았다. 연극에 동화되어 착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적어도 유우키 마코토가 알고 있는 ‘사랑’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었음으로, 그는 의외로 저가 배역에 몰입을 잘하는 배우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랑이 거세된 일상이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 아케호시와 이야기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볼 때, 그 모든 시간은 텅 빈 것 같았다. 비어 있으니 잘 수 밖에 없었다.그림자가 없는 기분이었다. 공허하며, 무미건조했다. 외로운 건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주일 중 마지막 날에 유우키는 감자칩을 먹으며 아케호시에게 질문했다. 파삭파삭한 감자칩은 입 안에서 강한 짠맛을 남기고 부서져가고 있었다. 있지 아케호시 군, 요즘 왜 이렇게 멍한 느낌이지? 아케호시 또한 감자칩을 씹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그거야 시차적응을 하고 있으니까!―시차적응?―응, 세나 선배 집에 익숙해졌다가 다시 숙소생활 하려니까 붕 뜬 느낌인 거지. 화장실 위치라던가 가구 배치 같은 것도 다 다를 거 아냐.―아, 그렇구나.―응응, 웃키는 지금 적응 중인 거지!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걸?아케호시의 말은 정말로 명쾌해서,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가 잃어버린 중력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나에게는 아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유우키는 자신이 그에게 좀 더 매달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랑은 이처럼 쉽게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보고 싶어 끙끙 앓게 되는, 그런 모습이었다. 유우키는 어른이 된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부유하는 제 감정이 실로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다음 날에도 유우키 마코토의 그림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방 문을 열었을 때 이층침대 두 개가 있는 광경에 놀라지 않았고, 트릭스타의 숙소가 위치한 아파트의 현관 비밀번호 키를 헷갈리지 않고 모두 올바르게 입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공허한 기분이었다. 짐은 아직 풀지 않았다. 손을 댈 기운이 없었고, 그걸 굳이 열고 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싶지 않았다. 그의 캐리어는 구석처럼 남아 있었다. 침대 옆에, 누운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유우키는 제 침대에 누워 옆을 바라보았다. 파란색 캐리어의 손잡이에는 리본이 묶여 있었다. 짐 풀 때, 내 생각 하라는 이즈미의 목소리가 번져왔다. 기억 해 내자마자 볼이 간질거렸다. 그런 말을 즉석으로 생각 해 내는 것도 프로답다고 생각하다가 유우키는 기지개를 폈다. 여전히 그는 공허했다. 그는 자신의 지금 상태가 ‘심심하다’ 라고 진단했다. 성급한 결론이었지만 정정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결국 이주일이 지난 후에도 그는 짐을 풀지 못했다.   삼일을 더 흘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유우키 마코토는 여전히 ‘심심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을 심심한 상태로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일이라도 할까 싶어 그는 대본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한겨울 밤의 꿈』을 촬영 한 뒤에 오히려 일이 많이 들어왔다. 그는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일주일에 한 번 방영하는 16부작 드라마의 대본이었다. 오디션만 보러 나가면 백퍼센트라던 매니저의 호들갑이 떠올랐다. 그는 그것을 읽으며 저에게 찾아온 무료함을 달래고자 했다. 하지만 겪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부질 없게 느껴졌다. 유우키는 침대 위에서 발을 움직였다.텍스트는 눈에는 읽혔으나 머리에는 닿지 않았다. 그는 계속 같은 대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러브코미디라는 대본은 러브도 없었고, 코미디도 없게 느껴졌다. 무미건조한 일상, 어딘가 빈 듯한 느낌. 유우키는 촬영 후 후유증이 이렇게 깊게 남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이 상태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트릭스타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히다카는 피곤해서 그래, 라고 대답했고, 아케호시는 적응 중!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풀릴 피로는 없었고, 적응은 이미 마친 후였다. 그는 더 이상 두 집의 비밀번호를 헷갈리지 않았다.이사라는 읽음 표시가 사라진 뒤로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그는 화보 촬영 때문에 바빴다고 운을 떼면서, ‘짐 정리를 해보는 건 어떨까?’하고 말했다. 미뤄둔 걸 하고 나면 좀 기운이 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이 올라오자, 히다카와 아케호시도 동의했다. 그들은 유우키가 캐리어를 너무 방치해 두고 있다고 말했다. 미련이라도 남긴 게 아니면 얼른 정리하라는 아케호시의 메시지를 보면서, 유우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거실에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방을 몇 개나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량은 중화되지 않았다.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거기까지 가서 전원을 끄고 오기에도 귀찮았다. 쓸데없는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감미로운 사랑을 노래하는 초콜릿 광고의 CM송을 흥얼거리면서, 유우키는 캐리어 앞에 앉았다. 그는 캐리어를 눕혔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수건의 양 끝이, 토끼 귀처럼 바짝 서 있었다. 유우키는 그 매듭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파란색 캐리어에 매여 있는 손수건의 매듭은, 캐리어를 여는 데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풀어야 가방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의 문제였다. 그는 기분파가 아니었다. 그는 볼을 부풀렸다가, 푸후 하고 공기를 토해냈다. 손을 대고 매듭을 풀었다. 원래대로라면 닿지 않아야 했을 양 끄트머리가 제법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유우키는 이걸 묶을 때의 세나를 떠올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번져오는 풍경이었다.그는 헛손질을 했다. 아쉽다는 듯, 계속- 계속- 손을 움직였다. 단단하지 않다고 풀어내고, 모양이 예쁘지 않다고 풀어냈다. 그렇게 공을 들인 탓인지, 그는 두 번째 매듭을 풀 수 없었다. 짧게 깎은 손가락이 들어가질 않았다. 볼펜의 끄트머리를 사용해서 매듭과 매듭 사이를 들어올리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손수건에 몇 번의 선을 긋고 나서야 그 무의미한 행위를 그만 두었다.탈력감이 몰려왔다. 캐리어를 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른이 돼서 손수건 하나 못 푼다면서 스스로를 탓했다. 그는 캐리어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11월 2일」이었다. 연예인 캐리어 치고는 패스워드가 단촐한 것은, 마지막 촬영 때 그렇게 바꾸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우키는 하품을 했다. 세나의 집 비밀번호가 그런 식이었던 것도 PD의 지시였을 거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허탈했다. 사실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음으로, 이런 방식의 서운함을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그는 자물쇠를 풀었다. 지퍼소리가 들리고, 캐리어가 열렸다. 그리고 맨 위에 올려 있는 물건을 보는 순간, 유우키는 아, 하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애써 추켜올렸던 안경이 제 자리를 잃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캐리어를 제 등 뒤에 놓았다. 그는 벽을 바라보았다. 뒤를 돌 자신이 없었다. 목이 턱턱 막혀왔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들은 물밀 듯 밀려왔다. 거친 파도가 메마른 세계를 적셨다.그는 몇 번의 한숨을 내쉬고, 몇 번의 탄식을 내뱉었다. 내내 세나의 거실에 걸려 있던 사진이 그 곳에 있었다. 이마를 마주대고, 엉켜있지만 서로의 새끼손가락에 걸린 ‘운명의 실’이 보이게 손을 잡았다. 그 때 잡았던 손가락의 감촉이, 아무것도 잡지 않은 맨손에 찾아왔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목 끝에서 치받쳐 오르는 사랑과, 의식해도 성급하게 들이키고 마는 숨결에 눈물이 났다. 사진 한 장이 트리거가 됐다. 탕, 하는 총성 대신에 울음소리를 내보냈다.유우키는 뒤를 돌았다. 그림자가 천천히 발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진 한 장, 사진 한 장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세나의 모습.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나, 고양이 수염 같은 줄이 들어 있는 눈가. 서로의 호흡을 마실 수 있는 그 사적이고 사소한 거리. 비어 있던 모든 것은 세나 이즈미의 파랑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우주의 중력이 재편성되고 있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유우키는 천천히 사진을 캐리어 위, 원래 있었던 자리에 돌려두었다.24인치. 캐리어에 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들어있는 모든 것에는 세나 이즈미가 묻어 있었다. 넣었던 옷을 꺼낼 때 마다 섬유유연제 향이 번져왔다. 샤프란 향을 좋아하는 유우키와 달리, 세나는 비누 향이 강한 걸 선호했다. 사소한 습관이 모두 달랐다. 그럼에도 나름 ‘편하게’ 지냈던 건, 세나 덕분이었을 것이다. 유우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대기를 깨달은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왔다.그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공허에, 차곡차곡 감정이 쌓였다. 그동안 애써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감정 하나는 누름돌 하나의 무게와 같았다. 그는 세나 이즈미라는 이름의 샘에 가라앉고 있었다. 외면하던 감정들을 유우키는 다시 정면으로 마주했다. 캐리어에 담아온 사랑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는 웨딩사진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뒤에, 낱장으로 된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양 끝에 서서, 뒤를 돌고 있다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간다. 무표정이던 유우키와 달리 세나는 언제나 웃고 있다가, 만남의 순간에만 웃음을 지운다. 면사포에 가려진 눈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여러 장의 사진이 만들어내는 서사에, 눈앞이 아득했다. 다시 닿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발질을 하면서 핸드폰 쪽으로 다가갔다. 심호흡을 하면서 그는 전화를 걸었다.수신음이 갔다. 컬러링이 울렸다. 영화 「원스」의 OST였다. 남성 보컬이 노래할 때 마다, 가사가 마음에 아프게 들어왔다. 서로를 속이는, 의미 없는 게임은, 우릴 지치게 할 뿐이야. 가라앉는 이 배를 붙잡아줘, 우린 아직 늦지 않았어. 노래의 후렴부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유우키는 일어나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방 안을 모두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가 끊어졌다. 할 말이 있으면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세나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자동응답기와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유우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1번과 1번, 그리고 2번을 차례대로 입력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지금은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가 들어줄지 알 수 없는 소리샘에, 유우키는 제 감정을 쏟아내다가, 전화기를 바닥으로 냅다 던졌다.눈물이 핑 돌았다. 어른이 됐는데도 사랑을 움켜쥘 수 없었다. 세나를 봐야만 한다. 봐야만 한다. 보고, 눈을 마주치고 다시 한 번 좋아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이성이 휘발되고 있었다. 유우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침실에서 갈아입을 옷을 찾다가, 그는 드레스룸으로 성급하게 다가갔다. 전신거울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자, 떡진 머리와 푸석푸석한 얼굴이 보였다. 빈 채로 다녔던 탓이었다.그는 머리카락을 양 손으로 쥐어뜯다가, 샤워 룸 앞에서 서성였다. 일의 순서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선두가 없는 주머니쥐처럼 집 안을 뱅뱅 맴돌았다. 어느 하나도 정할 수 없었다. 급하게 차오른 감정들은 그의 목 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동안의 공허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랑은 언제나 충동적이며 갑자기 찾아온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눈물이 번졌다.연락이 없는 이주일, 그리고 삼일 동안 무슨 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했을까. 제 생각은 했을까, 아니면 ‘그럴 줄 알았어’ 라며 가볍게 넘겼을까.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생각이 깊어졌다. 그가 상처받아 있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이 너무나 무거웠다. 잠시 잊은 사랑이 치받침처럼 몰려왔다. 마음속이 화했다. 화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좋아해, 라고 유우키는 마법처럼 속삭였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거실에 방치하듯 틀어둔 텔레비전에서 울리는 광고 소리에 귀가 아팠다.유우키 마코토의 사랑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갑자기 기억 해 내는 것. 열아홉 소년 시절 이후 덮어두었던 걸 스물여섯에서야 깨달았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언제나 늦은 사랑. 박자가 맞지 않는 악곡 같았다. 그의 사랑은 돌림노래처럼 울렸다. 그는 떨어진 전화기를 집었다. 온 연락은 없었고,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직 늦지 않았음을 노래하는 목소리를 따라 엉엉 울었다. 소년처럼 울었으나, 그는 어른이었다.이런 사랑에 응답받을 수 있을까. 늦어버린 사랑에 그는 무력했다. 연신 전화를 걸어도 들려오는 건 없었다. 밤새도록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었다. 연출 때문에 찍은 사진이 아니라, 정말로 사랑하는 상태를 프레임 안에 박제하고 싶었다. 못하는 요리지만 만들어 주고 싶었고, ‘세나 이즈미의 날’을 지정해서 기념하고 싶었다. 갈라진 시간 사이를 이어 붙이고 싶었다.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사랑해’라는 말이 나오거나, 키스 씬이 나올 때 마다 입술을 마주치면서, 푸스스 웃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의 겨울에는 비가 내렸다. 꿈으로 끝나버린 한겨울에서, 유우키는 멍하게 서있었다. 허무, 그리고 공허, 그는 제 그림자가 더욱 더 짙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중력을 머어 제대로 돌고 있는 세상 안에서, 유우키가 갈구할 수 있는 것은 세나 이즈미 뿐이었다. 그 때도 놓쳤던 손이었다. 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놓아버린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 충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이기에 서툴렀다. 사랑 해 본 적 없었기에 방황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우키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드레스룸의 모든 옷을 꺼내 놓으려는 것처럼 거칠게 옷장을 열었다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옷가지들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발걸음소리가, 유우키에게 다가왔다. 유우키는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코를 훌쩍였다. 이사라 군, 하고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이사라는 한 달음에 달려 그의 상태를 체크했다.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라며 진중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위안이었다.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더 이상 소년이 될 수 없는 어른의 눈물은 추하기만 했다.“이사라 군, 나 어떡해.”맥락 없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라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아, 라고 말했다. 일주일이 지나버렸어, 시간이 너무 많이 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지났어,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날 못 믿는 사람인데 날 더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나는 진짜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 사랑이 너무 충동적이라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나는 진짜 이즈미 씨에게 닿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어떡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미움 받기 싫은데, 사랑하고 싶은데 어떡해, 나 어떡해,유우키가 맥락 없이 쏟아낸 소리에 이사라는 그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나는 이즈미 씨가 필요해. 유우키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쉴 때 마다 천천히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이 다가왔다.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다만 거실에 틀어둔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들릴 뿐이었다. 소음 뿐인 세계에서 유우키가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세나를 봐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이주일 하고도 삼일 동안 버린 시간들이 미치도록 아까웠다.―끝나버린 마법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가장 듣고 싶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우키는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방황했다. 이사라 또한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하고 중얼거렸다. 유우키는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이사라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몇 번을 미끄러지며 거실로 다가갔다. 이사라는 황급히 유우키를 쫓아왔다. 거실 한쪽 벽을 가득 메꾼 텔레비전에서는, 세나 이즈미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모르게,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우키에게 햇살이 들어오지 않게 세나는 커튼을 굳게 닫았다.―사실 사랑에 마법은 없을 지도 몰라요. 나랑, 유우 군을 보면.―왜 그렇게 생각해요?카메라맨이 물었다. 초기 촬영 분이었다. 세나는 작게 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그는 유우키가 차버린 이불을 정리하며, 목 끝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사랑을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연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세나는 잔잔히 웃었다. 한 번도 보답 받은 적 없었으니까,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결혼 했잖아요, 카메라맨이 물었다. ‘어떻게든 극 안에’ 세나를 남겨두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화면 속 세나는 렌즈를 바라보다가, 아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네, 내가 움켜쥐었네. 라고 말하다가,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 일상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삭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유우키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유우키가 뒤척이자, 세나는 아, 라고 작게 탄식했다. 애 깨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그는 침실에서 살금살금 나갔다. 그는 천천히 부엌으로 다가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아요? 카메라맨이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마법을 걸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지.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라서, 이렇게 풀칠을 하지 않으면 기분 나빠할 거야. 카메라 밖에서도 사랑 받고 싶으니까.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푸스스 웃었다. 나는 정말 유우 군을 좋아하니까, 라고 말하며 그는 양파를 썰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칼을 손에서 내려놓고, 손등으로 눈가를 콕콕 찍었다. 좀 더, 유우 군이 마법 피곤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때 구충제를 의심할 수 있을까? 안에서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하하, 웃었다.―사실 마법은 풀릴 때를 생각 하게 되는 것 같아. 추하고 짜증나겠지.―그런가요?―나는 내 사랑이 현실에 있었으면 좋겠다.꿈 말고.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칼질을 마저 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분홍빛의 자막이 ‘꿈을 초월한 사랑을 원하는 이즈미 씨’ 라고 말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의 등 뒤를 잡았다. 마른 등이었다. 유우키는 코를 훌쩍였다. 가야만 했다. 붙잡아야만 했다. 저런 얼굴, 저런 말이 거짓말일 리가 없다. 솔직함이 담긴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믿고 싶었다. 제 시간들이 어긋났다고 해도, 그걸 붙이려는 노력이라도 하고 싶었다. 코끝이 찡했다.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뒤늦게 깨닫는 사랑은 사양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받아주지 않을 건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고자 했다. 뭘 입고 가야 할까, 라고 메인 목으로 겨우 말하자, 갈린 목소리가 나왔다. 이사라는 일단 세수부터 하라며 유우키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밖에 추워, 아직 겨울이야.”겨우 세수를 하고 나오니, 이사라는 그에게 옷걸이 몇 개를 건네며 말했다. 가서 전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은 아닐까? 유우키는 그 동안의 이주, 그리고 삼일을 생각하며 말을 열었다. 여전히 코는 빨갰고, 목소리는 먹먹해 있었다. 일단 말하고 돌아와서, 맛있는 걸 먹자. 이사라는 결말을 알 수 없는 일에 자신감을 주듯,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더 늦는 것 보다는 지금이 나아. 이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어보였다.터지기 전에 다녀오겠습니다, 유우키는 천천히 말했다.이주일이나 고민하고도 사랑하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 이사라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찬바람이 불었다. 봄을 기대할 수 없는 추위였다. 먹구름 낀 하늘에서 눈이 한 송이 한 송이씩 퍼지고 있었다. 유우키는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하지만 곧 봄이 올 거야. 이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말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품 안에 갇고,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승산 없는 싸움에 몸을 던지는 건 어색했다. 유우키 마코토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언제나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겨울을 불러오는 것은 봄을 향한 간절한 염원. 유우키는 추위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발목에 달려 있는 그림자가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 해 주고 있었다. 느리게 피어오른 사랑이라는 이름의 온기가, 그의 볼에 닿았다. 미로 같은 제 사랑의 출구를 보고 싶었다. 함박눈이 나리기 시작했다. 봄이 올 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겨울이었다.하지만 유우키 마코토는 조심스럽게, 겨울을 향해 움직였다. 그의 세상은 온통 세나 이즈미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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